팩해주는 여자, 왁스발라주는 남자.
어릴때부터 남들의 머리에 왁스를 발라 다듬어 주는것을 즐거움으로 삼곤 했던 나는 자취하기 전까지 나이차이 많이 나는 형의 머리에 왁스를 발라주곤 했다. 형은 나에게 헤어디자이너를 권유했지만 난 싫다고 했다. 난 왁스를 발라 다듬어 주는 것만을 즐거움으로 삼을 뿐이지 그 외의 미용기술은 흥미도 없었거니와 미용실의 약품냄새도 싫었으니까. 난 결국 왁스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교정학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하지만 학교는 내가 사는 곳이 아닌 수도권에 있었기에, 나는 자취를 해야했고, 자연히 형을 비롯한 가족들과 떨어져 살게 되었다. 자취하는 동안 힘든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들은 친구가 빌붙어서 불편하다던데, 내 친구들은 알바로 바빠서 놀러오기는 커녕 나와 같이 놀 시간이 없었다. 그냥 교내에서 같이 밥먹는 시간 정도만 있었다. 생각해보면 참 좋은 친구를 뒀다. 하지만 딱 하나 힘든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왁스를 발라 머리를 다듬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릴때야 그 존재가 형이었지만 자취하는 지금 형은 없다. 그리하여 난 남의 머리를 다듬어 줄 수 없다. 내 친구들도 알바로 바빠서 왁스로 머리 다듬을 그럴 시간도 없다. 게다가 바빠서 송장꼴이 되어있는 친구들을 보자면 순전 내 취미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단순히 놀기위해서라도 따로 시간을 내달라고 하기도 좀 그랬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제일 괴로웠다.
그렇게 괴로워하는 내게 어느날 왁스를 발라 줄 사람이 생겼다. 그것도 남자가 아닌 여자.
신입생이 된 지 얼마안돼서 선배들이 누군지도 모를 시기에 그녀는 내게 다가왔다. 그것도 어느 우주에서 홱 날아온것 같았다. 수업을 마치고 가는 길, 그녀와 나는 부딪혔다. 저 남자분은 선배인가 동기인가 아니면 우리과 아닌가 아리송할 쯤 그 남자라고 여겼던 사람의 입에서 죄송하다는 소리가 나왔는데 그것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나는 저야말로 죄송하다고 하고 가려고 일어났는데 공교롭게도 발목이 삐었는지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그런 나를 학교 보건실까지 부축해주었다. 보건실에 가는 길에 얼마간 대화를 나누었는데 생각보다 나와 잘 맞아서 보건소를 나왔을때는 이미 죽마고우 부럽지 않은 대학친구가 되어있었다.
그 후 얼마간 자주, 혹은 매일 몇시간 씩 마주치곤 했는데 그럴때마다 우리 사이는 더더욱 가까워졌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뭔가 우리 둘만 있을때의 미묘한 기류를 서로가 눈치채기 시작했다. 이게 만나고나서 사랑이 싹트는 건가 싶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어느날 이런 기류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고, 나 또한 그녀에 공감하며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고백했다.
이렇게 그녀와 얼렁뚱땅 애인이 되었고 우리는 나름 건전한 연인사이를 간직해 갔다. 그렇게 건전한 연인사이를 유지해 갈 때 나는 그녀의 짧은 머리에 왁스를 발라주고 싶었지만 뭐라 말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 날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머리에 왁스를 발라도 되겠냐고 사귄 지 한 달 후가 되는 날에 말했고, 그녀는 어리둥절해하면서 승낙했다.
내 자취방에 가면 좀 그러니까 학교에서 인적이 드물거나 없는 곳을 골라 항상 아침 9시에 만나자는 나의 제안에 그녀는 흔쾌히 응했고, 오전수업이 없을때도 매일 9시에 만나서 난 그녀의 머리에 왁스를 발라주고, 그녀는 거울을 들고와 이리저리 지시를 해주었다. 그녀는 항상 왁스를 바르고나서는 미모를 살려줘서 고맙다는 소리를 하였고, 그녀도 나를 위해 뭔가를 해 주고 싶어하는듯 했다. 항상 가방안에서 뭔가를 꼼지락거리곤 했지만 나는 '여자가방에 든게 많아서 정리하느라 그렇겠지, 뭐.'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언제나 속에서 꼼지락거리던 가방에서 팩을 한가득 꺼냈다. 내가 이게 뭐야하고 물으니, 그녀는 내게 남자도 자기 관리가 필요하다느니, 피부가 이게 뭐니 하면서 나에게 팩을 권했고 바르기 부끄러워 하는 나에게 한가지 제안을 했다. 내가 팩을 발라줄게.
그리하여 그녀가 팩을 발라주고 난 그녀의 짧은 머리를 왁싱해주는 일이 데이트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귀찮아서 데이트를 하기 싫을때도 언제나 이 일만은 학교 뒷뜰에서 했던것으로, 나는 회상한다.
하지만 그녀와 나는 헤어졌다. 원인은 그녀의 유학때문이었다. 그녀는 기다리지 말고 여기서 깔끔하게 끝나자고 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고. 다시만날 날의 기약이 없는 나보다 좋은여자 사귀라고 해 놓고는 뒤도돌아보지 않고 가 버렸다. 그때는 내가 대학교 1학년 2학기 기말고사의 마지막 과목을 끝낸 날의 저녁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사귄 지 7개월하고 보름 되는 날이기도 했다. 헤어지자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려왔지만 그때의 나로써는 붙잡을 방법도, 그녀와 함께 떠날 방법도 없어 그냥 놔주기로 했다. 좋은 사람이었지만..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나도 미련없이 휴학계를 내고 군대를 갔다. 그리고 다시 복학했다. 그녀를 다시 볼 수도 없었다.
어느 겨울날 저녁, 우연히 지나가면서 그녀를 봤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많이 길어져 등까지 머리카락이 닿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싸늘한 공기가 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날 못알아보는 듯 했다. 아니, 모른척 했을지도 모르지. 말을 걸어볼까, 망설이던 차에 그녀는 나를 떠났던 때 처럼 싸늘하게 나를 스치고 지나가 버렸다.
우리가 헤어지고 넌 머리를 길렀고, 난 팩을 그만하게 돼서 피부가 거칠어지게 됐지. 난 그생각을 하면서 턱을 슬슬 문질렀다. 깎지않은 수염까지 더해져 까칠한 느낌이 들어왔다. 그제서야 아.. 우리가 헤어진지 꽤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복학 후부터 줄이어 새로 소개를 받은 여자들은 자기 팩 바르느라 나에게 팩을 권하기는 커녕 조금만 자기팩을 건드려도 화를 내곤 했다. 그래서 사소하지만 여튼 그 이유로 사귀기도 전에 정이 떨어져 다시는 안볼 사이로 전락해버리곤 했다.
이런 못된마음은 가지면 안되지만 그렇게 팩때문에 정이 떨어질때마다 예전의 그녀와 항상 비교를 하곤 했다. 자기 피부가 더 신경쓰일텐데도 항상 나를 위해서 팩을 가득 사오던 그녀와. 그때 우연히 지나가면서 그녀를 보고 말을 걸것을, 후회하는 감정이 밀려올때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에 미련을 가지지 않을것 같아서 말을 걸면 더 후회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애써 후회하는 감정을 누르곤 했다.
하지만 다시 만나는 그런 우연은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3학년 겨울방학, 모자란 학점을 채우기위해 들은 계절학기 수업에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우리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때 처럼 후회하기 싫어 다시 말을 걸었다.
안녕.
이 인사를 건네기가 어려웠지만 막상 건네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그녀는 그때처럼 외면하지 않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랜만이네.
그녀가 말을 덧붙이려는 순간 교수가 들어왔고, 그녀는 마치고 얘기하자. 라며 수업에 열중했다. 나 또한 그랬다.
마치고 우리는 계속 강의실에 있었다. 다른 학생들과 교수들이 빠져나간 시점, 게다가 늦은 오후라 강의실 밖을 봐도 사람들이 얼마 없었다. 우리는 적막한 기류에 휩쓸려 말을 아끼지 않으면 안될것 같아서 그냥 조용히 있었다. 한참 뒤 내가 말을 걸었다.
너 머리 많이 길었네.
왁스발라줄 사람이 없으니까 자연스럽게 숏컷스타일이 보기 싫게 되더라. 그래서 기르게 된거고. 그런데 넌 피부가 왜이렇게 거칠어. 내가 없으니 아주 팩 안바르고 다니지, 응?
어떻게 알았지? 새로 소개팅하는 여자들은 팩을 주기는 커녕 뺏아가기만 해서...
나도 같은 입장이야. 왁스를 발라주기는 커녕 지머리에 바르기 바쁘지.
그럴때 괜히 정떨어지고 그렇지? 이상한데서 소심하다니깐 나말야.
나도 그럴때 정떨어지던데..
우리는 그렇게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많이 변한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면도 있구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꼭 우리가 처음 만났던때로 되돌아간것 같았다. 그러다가 그녀가 내 손을 잡고 뭔가를 결심하듯이 말했다.
먼저 헤어지자고 했던 때, 실은..
우리 다시 시작하자.
내가 그녀의 말을 끊고 말했다. 지금이 기회다. 지금아니면 그때도 사랑했고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 그녀를 잡을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거라는 다급함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녀는 놀라더니 이내 놀란표정을 서서히 풀어가며 말했다.
좋아. 이번에는 고백을 네가 먼저 했네.. 나도 실은 유학생활하면서 네 생각 많이 났어. 앞으로는 장기간 떨어져 있더라도 대책없이 헤어지자고, 그렇게 대책없이 굴지 않을게... 그럼..
그녀는 말을 잇지못하다 다시 말했다.
그럼 내 머리에 다시 왁스 발라주는 거다?
나도 오랜만에 팩좀 받아보자. 피부가 아주 개판이 됐어.
우리는 그렇게 낄낄거리며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그 다음날, 그녀는 다시 머리를 짧게 잘라서 내게로 왔다. 다시는 그녀가 머리를 기르지 못하게, 꼭 붙잡아둬야지. 난 그녀를 껴안았다.